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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滅記] 이야기 소묘 - 2006년 03월 09일 14시 41분
2006년 03월 09일 14시 41분 2006년 03월 09일 14시 41분

어쩌면, 이 세상은 나를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는 지도 몰라.
내리는 사람도 드문, 종점이 가까운 지하철 플랫폼의 벤치에서 일어난 나는 저만치 끝에서 잦은 기침을 해대는 그를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미 막차가 지나가버린 지하철 역의 플랫폼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가 숨가쁘게 해대는 기침은 휑뎅그레한 터널 여기저기로 울려나갔다.
괴로운 거야, 저 사람은. 너무나도 괴로워서 저러는 거야. 나는, 그래, 어쩌면 나는 저 사람이 왜 저러는 지 알 것도 같아. 저러다가 이제 곧 피를 토하겠지. 기침에 섞여서 검붉은 핏덩이가 이 대리석 바닥으로 쏟아질 거야. 그리고 저 사람은 그 위로 쓰러져 버리겠지. 온몸에 피철갑을 하고, 계속 괴로워하며, 그래도 저 기침은 멈추지 않을 거야. 난 그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알 것 같아.
탕! 소리가 나고 플랫폼이 온통 어두워졌다. 온통 새까만 어둠이 갑자기 내 눈으로 파고들었다.
그것은 내 눈알을 파헤치고, 시신경을 따라 대뇌를 관통해서 뒷통수를 뚫고 빠져나갔다. 나는 사방으로 울리는 기침소리를 들으며 뒤로 쓰러져버렸다. 나를 둘러싼 어둠이 둥그렇게 뭉치면서 내 위를 떠다녔다.
그래, 넌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아. 그래, 이게 네가 원하는 거라면, 그래, 네 맘대로 해봐.
기침소리가 서서히 멀어져갔다. 나는 그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계속 그대로 누워있었다.

날씨는 제법 매서웠다.
나는 목도리를 코잔등까지 올리고 미끄러질세라 종종걸음을 치며 걸었다. 거리는 온통 빙판이었다.
스케이트를 신고 올 걸 그랬어. 알아? 폼도 나고 이리 걷기 힘들지 않을 지도 모르잖아.
그녀는 웃었다. 그녀의 웃음소리는 마치 노인들이 터트리는 너털웃음과도 닮았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 주름살은 없다. 나는 그점이 맘에 들었다. 그녀가 한 번 허청거리면서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비명소리는 까마귀가 짖는 소리를 닮았다. 그녀는 내 팔을 세게 잡아당겼고, 그 서슬에 나도 덩달아 빙판길을 뒹굴었다.
하늘은 무척이나 건조했다.
분명히 구름이 끼어서 저리도 하늘이 칙칙한 거야. 이상하지? 구름이 저렇게 끼었는데도.뭐가?
바작바작 마른 느낌이 들어. 라이타를 켜면 바로 대기에 불이 확 옮겨붙기라도 할 듯이 말야.
대폭발이겠네?
아마 세상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거야.
우리마저도?
글세, 넌 모르겠지만, 난 아마 살아남을 지도 몰라.
왜?
이놈의 세상은 그다지 날 좋아하는 거 같지 않거든. 속 시원하다며 지들끼리 털털거리고 잘 갈 지도.
나는 그녀의 소매를 끌고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500원짜리 호빵이 김을 무럭무럭 내며 자기 집을 빠져나왔다. 계산을 치르고 그녀와 나는 벽유리 너머로 바깥을 내다보며 호빵을 먹었다.

담배가 다 떨어졌기 때문에 나는 추운 밤동네를 10분동안 걸어 편의점에 와야만 했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자 따스한 공기가 느껴졌다. 담배 한 갑을 계산대에 올려놓고 무언가 더 살 것이 없나 편의점 안을 둘러보던 나는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편의점 천정을 파고 들어가있는 형광등은 계속 하얀 빛을 뿌려대고 있었고 진열대에 널린 물건들은 그 빛을 받아 역시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여기도 건조해. 무척이나.
나는 담배값만 계산대에 건네고 유리문을 밀어 나오다가 그만 문 앞에 있는 계단을 구르고 말았다. 점원이 놀라서 쫓아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콘크리트로 포장된 땅바닥은 무척이나 차가왔다.
누구야, 뒤에서 민 게!
일어나려는데 쫓아나온 점원의 손이 어깨에 닿았다. 그러자 나는 그만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점원의 목소리가 허공을 떠다녔고 땅바닥이 밑으로 꺼져들어가기 시작했다. 천천히, 그러나 점점 가속이 붙으면서 내 몸은 조금씩 땅바닥에서 떨어졌다. 땅바닥이 저만치 밑에 어둠에 잠겨버리자 그때까지 허공을 떠다니던 점원의 목소리가 나에게로 날아왔다. 순간 나는 엄청난 공포를 느꼈고, 굳어버린 몸을 마구 흔들어대며 비명을 질러댔다.

터널은 키가 매우 낮았기 때문에 나는 허리를 굽혀야만 했다. 쇠붙이가 돌벽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잠깐의 사이도 두지 않고 끊임없이 들려왔다. 숨이 막혔다.
여기는 환기가 제대로 안되고 있어. 이대로 가다간 나는 분명히 질식해서 죽고 말거야.
그는 웃고 있었다. 입 주위로 검붉게 말라붙은 피자국이 보였다. 나는 그가 밀어대는 대로 터널을 따라 걸었다. 숨이 찼고 목구멍까지 바작거리며 말라갔다. 터널은 끝이 없었다. 대신에 깊어보이는 어둠만이 꼭 그만큼의 거리를 두고 나를 안내하고 있었다.
그래, 이대로, 나는 죽고 마는 거야. 내가 언제나 생각해왔듯이, 나는 세상으로부터 유폐되었고, 그리고 스스로 몰락해가고 있는 중이야. 하지만, 너는 내가 이것을 정말로 원했다고 생각했던 거야? 나는 단지 피해자라고. 너는 네 맘대로 나를 버렸고, 내가 알아서 죽도록 방치했어. 이것은 내 잘못이 아니야. 난 피해자야. 완전히 당한 거라고.
무릎이 허청거렸고, 나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쇠붙이가 돌벽을 긁어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아주 오래 이어졌고, 점점 커지며 비명소리가 되었다. 나는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터널 바닥을 뒹굴었다.
그만해! 난 이런 일을 당할 이유가 없어!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마!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말란 말이야!

사람들이 하나 둘씩 들어서기 시작했다. 조금 뒤에 방송이 들리고 노란 불빛과 함께 지하철이 들어왔다. 굉음이 서서히 멎고 지하철 문이 열리자 나는 앉아있던 벤치에서 일어섰다. 내가 올라탄 객차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아무데나 잡고 앉았다. 방송이 들리고 문이 닫히자 지하철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플랫폼을 지나자 맞은편 유리창에 내 얼굴이 비쳐보였다. 내리쪼이는 형광등 불빛으로 내 얼굴은 마치 오랫동안 폐병을 앓은 것처럼 적당히 그로테스크하게 말라보였으며, 또 창백했다. 마른 기침을 했다. 아침을 거른 속이 쓰렸다. 다음 역을 안내하는 방송이 나왔다. 지하철은, 그러나 계속 달리고 있었다. 나는 결코 그 끝까지 가본 적은 없지만, 적어도 내가 내려야 할 곳은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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